김밥의 미억(美憶)
작성일 : 2026.09.11 11:11 수정일 : 2026.09.11 15:52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email protected])

소싯적 일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봄 소풍을 맞았다. 요즘처럼 편의점이 흔했던 시절도 아니었고, 김밥집이 동네마다 있던 때도 아니었다. 소풍날이면 엄마가 새벽부터 일어나 정성껏 김밥을 싸주는 것이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없었던 나는 김밥조차 챙겨주는 가족이 없었다. 소풍날 다른 아이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알록달록한 김밥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친구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김밥을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그 틈에서 나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외로움은 참으로 컸다. 그런데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가정환경조사서’를 통해 내가 엄마 없는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담임 선생님께서 자신의 김밥을 나에게 나눠주신 것이다.
선생님이 건네주신 김밥 몇 줄은 어린 나에게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았던 한 아이에게 건네진 따뜻한 사랑이었다. 당시 그 김밥은 어찌나 맛이 있었던지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날의 김밥 맛과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김밥의 추억’보다 아름다운 표현인 ‘김밥의 미억(美憶)’이라고 부르고 싶다.
맛있는 음식에 아름다운 기억이 더해졌으니 말이다. 김밥은 이제 우리 일상에서 너무나 익숙한 음식이 되었다. 소풍과 운동회 때 먹던 특별한 음식에서 출발해 바쁜 현대인의 한 끼 식사로 자리 잡았다.
밥과 김을 기본으로 단무지, 시금치, 당근, 계란, 햄, 우엉 등 다양한 재료가 어우러지면서 맛과 모양도 무궁무진하게 변했다. 충무김밥처럼 밥과 반찬을 따로 먹는 독특한 형태도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김밥이 이제 국경까지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특히 미국 등 해외에서도 김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의 대표주자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거 우리에게는 소풍날의 별미였던 김밥이 이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음식으로 성장한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오는 9월 18일 대전대학교에서 가을 체육대회를 연다. 아마 그날 점심의 특식(?)도 김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운동장에서 땀을 흘린 뒤 급우들과 함께 먹는 김밥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김밥은 참 특별한 음식이다. 비싼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맛있고, 혼자 먹어도 좋지만 여럿이 나눠 먹으면 더욱 맛있다. 무엇보다 김밥에는 사람의 정이 들어간다.
엄마가 싸준 김밥에는 모정이, 아빠가 말없이 준비한 김밥에는 부정이, 선생님이 나눠준 김밥에는 사제 간의 사랑이 담긴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처럼 김밥을 사랑하는 민족도 있을까?
물론 각 나라마다 자랑하는 음식은 있다. 그렇지만 김밥처럼 한 줄의 음식에 밥과 반찬, 정성과 추억까지 함께 돌돌 말아 넣은 음식은 흔치 않을 듯싶다. 김밥 한 줄을 썰 때마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교차된다.
그리고 그 조각 하나를 입에 넣을 때마다 잊고 있던 추억 하나가 되살아난다. 나에게 김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어린 시절 외로운 아이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던 선생님의 마음이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과 시간의 맛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김밥을 먹는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기억을 다시 맛보기 위해서다. 오늘 동네 김밥집에서 김밥을 사면서 느낀 감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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