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멀리 있지 않더라
작성일 : 2026.09.19 18:10 수정일 : 2026.09.20 05:16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email protected])

내일은 서울역으로 간다. 사랑하는 딸과 외손녀를 만나기 위해서다. 딸의 손을 잡고 올 외손녀를 서울역 역사에서 맞이해 집으로 데려온 뒤, 며칠 동안 함께 먹고 자며 지낼 예정이다.
계절이 한결 부드러워진 요즘이라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진다. 서울역에 도착해 사람들 사이에서 딸과 외손녀의 얼굴을 찾을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 만나지 않았는데도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오늘 아내는 아침부터 부엌을 떠나지 않았다. 손녀가 오면 무엇을 먹일까 궁리하다가 깻잎을 한 장 한 장 씻고, 물기를 털어 양념을 만들었다.
간장에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를 더하고, 짭조름한 맛 사이로 은근한 단맛이 돌도록 간을 맞춘 뒤 깻잎마다 양념을 얹었다. 얇고 여린 잎은 금세 숨이 죽지만, 너무 세게 다루면 찢어지기 쉬워 손끝에 힘을 조절해야 한다.
차곡차곡 포개진 깻잎을 냄비에 앉히고 약한 불에서 천천히 졸이는 동안 부엌에는 향긋하고 따뜻한 냄새가 오래 머물렀다.
쇠고기장조림도 간단한 반찬이 아니다. 아내는 고기를 먼저 삶아 잡내를 덜어내고, 식힌 뒤 결을 따라 먹기 좋은 크기로 찢었다. 간장과 육수가 어우러진 국물에 고기를 넣고 조심스럽게 끓이자 단단했던 살이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불 앞에 선 아내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맺혔다. 누가 시킨 일도, 특별한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도 아니었다. 다만 딸과 외손녀가 밥상 앞에 앉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가 아내를 계속 움직이게 했다.
가족을 위한 음식에는 손품이 많이 들어간다. 손으로 씻고, 다듬고, 찢고, 양념을 바르고, 간을 보며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이라도 누가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에 따라 맛의 결이 달라진다.
깻잎 조림 한 젓가락에는 아내의 손끝과 시간, 내일 만날 딸을 향한 걱정과 기대가 함께 배어 있다. 쇠고기장조림 한 점에는 아이가 든든하게 먹기를 바라는 조용한 응원이 담긴다. 그것은 요리라기보다 사랑이 식탁에 머무는 방식에 가깝다.
나는 엄마에 대한 기억과 경험 없이 자랐다. 포근한 엄마 품에 안겨 잠들었던 장면도, 학교에서 돌아와 따뜻한 '엄마표 밥상'을 마주했던 순간도 내 기억 속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 부재를 평생 설명하지 못한 채 살아왔고,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지냈다.

그러나 가족을 이루고 딸을 키우면서, 내가 갖지 못한 장면들이 어떤 온기를 품고 있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내가 딸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 번도 충분히 누려 보지 못한 모성의 풍경이 눈앞에 조용히 펼쳐지는 듯하다.
딸은 나와 달리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아프면 걱정해 주는 부모가 있었고, 잘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는 부모가 있었다. 힘든 날에는 돌아와 쉴 집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고 자랐다.
나는 그 당연해 보이는 사랑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딸을 바라보며 배웠다. 딸이 지금 자신의 아이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외손녀의 작은 요구에도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볼 때면 사랑은 한 세대에서 멈추지 않고 다음 세대로 흘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가 만든 깻잎 조림과 쇠고기장조림은 그래서 내게 노스탤지어 푸드다. 내가 함께 살아 보지 못한 엄마의 부엌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면서, 동시에 지금 내 곁에 있는 아내와 우리가 함께 만든 가족의 시간을 증명하는 음식이다.
결핍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사랑이 그 빈자리를 다르게 바라보게 할 수는 있다. 아내의 손맛을 통해 나는 잃어버린 기억만이 아니라, 새로 이어지는 기억도 함께 받아들인다.
나는 딸과 외손녀를 무척 사랑한다. 어쩌면 조금 지독하다 싶을 만큼 사랑한다. 잘 먹었는지, 춥지는 않은지, 집에 돌아간 뒤에도 무탈한지 자꾸 묻고 싶다. 그 마음이 때로는 지나친 걱정으로 보일지 몰라도,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이 사랑을 배워 실천하는 방식은 이처럼 서툴고 간절할 수 있다.
내일 서울역에서 딸을 만나면 아내의 반찬부터 자랑하며 건넬 것이다. 그리고 밥상에 앉아 깻잎 한 장과 쇠고기 한 점을 나누며, 가족은 서로의 삶에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새삼 음미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볼 생각이다.
결국 엄마의 손맛은 오래된 조리법에만 있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손을 쓰고, 시간을 내고, 기다리는 마음이 곧 엄마의 손맛이다.
아내가 오늘 만든 두 가지 반찬은 내일 딸의 밥상에 올라가겠지만, 그 맛은 오래 남을 것이다. 엄마 없이 자란 내게 그것은 늦게 도착한 위로이고, 딸에게는 사랑받은 기억의 연장이며, 외손녀에게는 훗날 떠올릴 따뜻한 집의 냄새가 될 것이다.
나는 그 사랑의 냄새를 맡으며 내일 서울역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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