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는 배추를 셀 적에나 사용하는 것
작성일 : 2026.05.16 05:15 수정일 : 2026.05.16 12:35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email protected])

육십을 훨씬 넘긴 나이에 작년부터 다시 학생이 되어 주경야독하고 있다. 등교하여 책상 앞에 앉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낮에는 생업의 무게를 감당하고, 밤이 되면 졸린 눈을 비벼가며 책장을 넘기는 생활이 어느덧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늘 마음 한구석에는 벅찬 숨이 차오른다. 젊은 시절의 공부가 앞날을 준비하는 일이었다면, 지금의 공부는 지나온 세월을 다시 다잡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한 줄을 읽고도 오래 생각하게 되고, 한 문제를 풀고도 내 삶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 평소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몸이 조금 고단해도 오늘 할 분량을 채우고 나면 스스로에게 대견하다는 말을 건넬 수 있다.
문제는 시험이 일정한 속도로, 그러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올 때다. 요즘이 꼭 그런 시기다. 달력의 날짜들은 무심하게 앞으로 넘어가고, 해야 할 진도는 자꾸만 뒤에서 등을 떠민다.
한 장 더 읽어야 할 것 같고, 한 번 더 외워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책을 덮는 시간도 점점 늦어진다. 머리는 분명 더 붙들고 싶다고 하는데 몸은 먼저 지친 신호를 보낸다.
어깨는 돌처럼 굳고 눈은 뻑뻑해지며, 마음은 아직 시작도 못 한 일들 때문에 공연히 조급해진다. 전신이 피곤하다는 말이 이럴 때 가장 실감 난다.
특별히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데 온몸이 묵직하고,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다. 나는 원래 새벽 3시나 4시면 저절로 눈이 떠지는 사람이다. 이른 시간의 적막 속에서 책을 펴는 일이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켜 주곤 했다.

그런데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그 익숙한 기상 시간마저 무너지기 시작한다. 어제도 그랬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각이었고,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늦잠을 잔 탓에 하루가 흐트러질 것 같아 불안했고, 쉬어야 할 몸을 제대로 쉬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못내 답답했다. 시험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시험을 준비하는 시간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닳아버린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온다. 젊어서 하는 공부가 속도로 빛난다면, 늦은 나이에 하는 공부는 끈기로 빛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외운 것이 금세 희미해지고, 읽은 내용이 쉽게 엉키는 날도 많지만, 한 번 더 읽고 한 번 더 적어 내려가다 보면 아주 느린 걸음으로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시험은 여전히 부담스럽고, 때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 지난한 시간은 나를 작아지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배우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 준다.
그래서 오늘의 피곤과 초조까지도 결국은 부끄러운 약점이 아니라, 배우려는 사람만이 감당하는 값진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사실을 믿으며 다시 펜을 든다.
느리더라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이번 시험 앞에서도 조용히 나 자신을 견뎌 보려 한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는 배추를 셀 적에나 사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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