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기고

[에세이] 배움이라는 이름의 완행열차, 3학년 플랫폼에 서다

까만 것은 글씨, 하얀 것은 종이였지만

작성일 : 2026.06.20 08:13 수정일 : 2026.06.20 22:24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email protected])

 

“미리 축하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여러분들은 이제 3학년으로 진급합니다.”

 

어제 수업을 마칠 무렵 담임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교실에 울려 퍼지는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찰나의 침묵 뒤로 동급생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이어졌지만, 나는 선뜻 소리 내어 웃지 못했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은 바로 이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내 나이 예순여섯, 남들은 삶의 속도를 늦추고 지나온 길을 반추할 때 나는 대전시립중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앞만 보고 달려온 1년 반의 시간. 마침내 나는 중학교 3학년이라는,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도 낯선 플랫폼에 당당히 서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배움의 길은 늘 멀리서 바라만 보던 아득한 풍경이었다. 형편이 어려워, 혹은 시절이 하수상해 가슴속에 묻어두어야 했던 학업에 대한 미련은 나이가 들수록 지워지지 않는 묵은 체증처럼 남아 있었다.

 

뒤늦게 용기를 내어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하던 첫날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자식뻘, 혹은 손주뻘 되는 선생님들 앞에서 굽은 등과 둔해진 손가락으로 연필을 쥐었을 때, 부끄러움과 설렘이 동시에 온몸을 감쌌다.

 

만학(晩學)의 길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적은 ‘어제 배운 것을 오늘 까먹는’ 세월의 무게였다.

 

영어 단어 하나를 외우려면 돌아서면 잊어버리기를 수십 번, 어설픈 알파벳 발음을 입안에서 굴리다 보면 혀가 굳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수학 공식은 또 어찌나 야속한지, 교과서를 펼치면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였다.

 

취재 현장을 누비며 글을 쓰고 세상만사를 논할 때는 거침없던 나였지만, 교실 책상 앞에만 앉으면 한없이 작아지는 학생이 되곤 했다.

 

“이 나이에 무얼 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사서 고생을 할까?”라는 회의감이 늦은 밤 불 꺼진 방 안에서 문득문득 고개를 들 때도 비일비재했다. 침침한 눈으로 돋보기를 고쳐 쓰며 한 자 한 자 숙제를 해나갈 때마다, 온몸의 뼈마디가 배움의 비용을 청구하듯 쑤셔왔다.

 

 

그러나 그 모든 고단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배움이 주는 즐거움은 경이로웠다. 어제까지는 무심히 지나치던 길거리의 간판 속 영어 단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역사적 배경이 교과서의 한 페이지와 연결될 때의 희열은 젊은 시절 느꼈던 그 어떤 성취감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떠 갈 곳이 있다는 것, 나를 ‘학생’이라 불러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삶의 거대한 활력이었다.

 

나와 닮은 사연을 가진 학우들과 삐뚤빼뚤한 글씨로 받아쓰기를 하고, 서로의 오답을 화제로 소리 내어 웃던 식사 시간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진부한 경구가 내 삶을 통해 증명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진정 짜릿한 경험이었다.

 

이제 다음 주면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된다. 이 승급의 플랫폼은 단순히 학년이 올라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버텨낸 스스로에게 주는 훈장이자, 앞으로 마주할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는 출구이기도 하다.

 

뒤늦게 시작한 질주였기에 숨이 턱에 차오를 때도 잦았지만, 멈추지 않고 달려온 덕분에 마침내 이 자리까지 왔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고들 하지만, 내가 겸험해 보니‘배움의 최적기’는 바로 ‘내가 간절히 원할 때’였다.

 

예순일곱의 봄, 나는 여전히 서툴고 배워야 할 것 천지인 학생이다. 3학년이라는 새로운 대기선에서, 나는 다시 한번 신발 끈을 조여 맨다.

 

비록 걸음은 느리고 기억은 희미해질지언정, 배움을 향한 내 심장의 고동만큼은 그 누구보다 뜨겁게 뛰어 미지의 내일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 여러분의 후원(신협: 132-073-095814)이 펜의 힘을 높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