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발톱에 봉숭아 물들이기, 내 주제에 골프라니?
작성일 : 2026.06.21 06:54 수정일 : 2026.06.21 17:51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email protected])

“돼지 발톱에 봉숭아를 들인다”라는 속담이 있다. 겉모양을 지나치게 치장하여 제격에 맞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어릴 적 할머니가 찧어주신 봉숭아 꽃잎을 백반과 함께 무명실로 꽁꽁 동여매고 잠들던 기억이 선하다.
이튿날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풀었을 때 손톱 끝에 발갛게 물든 그 고운 빛깔은 수줍은 소년과 소녀의 어떤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투박하여 진흙이나 묻히고 다닐 돼지 발톱에 그 고운 봉숭아 물이라니... 참으로 당치도 않고 눈물겹도록 부조리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 매주 목요일 오후만 되면 내가 꼭 그 꼴이라는 생각이 들어 헛웃음이 나오곤 한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체육 과목 시간, 강사의 구령에 맞춰 골프채를 쥐는 내 모습이 영 낯설기 때문이다.
종목은 일반 골프를 조금 더 대중적이고 가볍게 변형했다는 ‘파크골프’다. 하지만 이름 뒤에 ‘파크’가 붙든 무엇이 붙든 간에 본질은 ‘골프(Golf)’가 아니던가.
초록빛으로 제법 잘 가꾸어진 인조 잔디 구장 위에서 알록달록의 공을 응시하며 골프채를 휘두르는 내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구석에서 ‘내 주제에 무슨 골프라니?’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정말이지 피식 나오는 실소를 제어하기가 힘들어진다. 사실 내게 골프라는 운동은 평생 나와 상관없는, 아니 상관없어야만 하는 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텔레비전 화면 속이나 신문 지면에서나 보던, 이른바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자 상류사회의 사치스러운 유희로만 여겼던 탓이다. 뙤약볕 아래서 땀 흘려 일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만이 미덕이라 배웠고, 또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온 세월이었다.

손에 굳은살이 박이고 거칠어진 내 투박한 손에는 골프채 대신 펜이나 일터의 도구들이 훨씬 잘 어울렸다. 그러니 파크골프장의 부드러운 잔디를 밟을 때마다 느껴지는 그 기묘한 이질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치 남의 옷을 훔쳐 입은 아이처럼, 내 몸짓 하나하나가 어색하고 쑥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가만히 채를 쥐고 잔디 위에 서면 문득 마음의 결이 조금씩 달라짐을 느낀다.
‘내 주제’라는 단어 속에 내가 스스로를 얼마나 좁은 틀 안에 가두어 두고 살았는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인생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참 많은 한계를 부여하곤 한다.
“이 나이에 무슨 새로운 공부냐”, “내 처지에 무슨 그런 여유냐?” 하며 지레 걸음을 물린다. 어쩌면 내가 느낀 그 실소는, 평생 엄격한 잣대로 스스로를 옭아매며 ‘허튼짓’을 허용하지 않았던 삶의 관성이 만들어낸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 보니, “돼지 발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는 것은 또 어때서?”인가도 싶다. 투박하고 못생긴 발톱이라 해서 고운 빛깔을 탐할 자격이 없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 거칠고 험한 발톱에 붉은 봉숭아 물을 들여보는 그 무모한 시도야말로, 메마른 삶에 던지는 작은 위트이자 낭만이 아닐까.
평생을 성실과 책임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지고 걸어온 내 삶에, 매주 목요일 오후의 파크골프는 어쩌면 늦게 찾아온 작은 보상이자 사치일지도 모른다.
공을 조준하고 채를 길게 빼어 가볍게 휘두른다. “깡~” 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초록 잔디 위를 굴러가는 하얀 공을 바라본다. 그 순간만큼은 내 나이도, 지나온 삶의 무게도, ‘내 주제’라는 알량한 자격지심도 모두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남들이 보기엔 여전히 어설프고 격에 맞지 않는 모습일지라도 상관없다. 내 투박한 손에 들린 골프채는 이제 부끄러움이 아니라, 남은 생을 조금 더 유연하고 즐겁게 살아가겠다는 나만의 작은 선언이다.
그래, 내 주제에 골프 좀 치면 어떤가. 더군다나 돈 한 푼 안 들어가는 공짜인 것을! 붉게 물든 손톱을 보며 미소 짓듯, 다가오는 목요일에는 그 어색한 실소를 활짝 피어나는 당당한 웃음으로 바꾸어 보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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