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웅숭깊은 의미
작성일 : 2026.07.20 15:07 수정일 : 2026.07.21 03:55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email protected])

60대 중반의 딸이 친정을 찾았다. 구순이 다 된 어머니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여준 딸이 반가우면서도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주름진 손을 꼭 쥐어잡고 그간 가슴에 쌓아두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부터 동네 사람 흉까지 한풀이하듯 쏟아놓았다. 그러다 문득 자리에 없는 또 다른 딸의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다.
“엄마, 00이는 자주 와요?”
“오기는 개뿔, 요새는 전화도 안 한단다. 망할 년 같으니라고!”
‘망할 년.’ -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타인의 불행이나 멸망을 비는 지독한 악담이자 비속어다. 그러나 이 섬뜩한 단어가 구순 어머니의 굽은 등과 덤덤한 말투를 거쳐 나오는 순간, 고함이나 증오의 뉘앙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과연 이 친정어머니가 던진 ‘망할 년’이라는 말은 정말 자기 자식이 망하기를 바라서 하는 ‘욕’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말에는 문맥과 온기를 통해서만 그 참뜻이 해석되는 웅숭깊은 맛이 있다. 소설가 박완서의 작품이나 시골 장터의 풍경에서 자주 접하듯, 부모가 자식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단어들은 대개 역설적인 애정의 다른 이름이다.
구순 어머니의 ‘망할 년’ 속에는 "보고 싶어 죽겠는데 왜 이리 얼굴 보기가 힘드니?", "바쁘게 사느라 전화 한 통 못 할 만큼 삶이 고단한 게냐?" 하는 서운함과 염려가 켜켜이 쌓여 있다.
사전적 정의만 따지는 차가운 언어학의 눈으로 보면 '망할 년'은 명백한 비하요, 거친 언사다. 하지만 우리말이 가진 특유의 웅숭깊음, 즉 품이 넓고 깊은 정서적 맥락을 이해한다면 그 말은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그리움의 반어법이 된다.
진짜 망하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제발 아무 일 없이 잘 살아서 어서 내 눈앞에 나타나 달라는 늙은 어미의 짓궂고도 서글픈 응어리인 셈이다.
젊은 시절에는 부모의 이런 거친 표현이 상처가 되거나 오해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이 육십을 넘어서고 스스로도 누군가의 어머니(할머니)이자 어른이 되어보면 비로소 알게 된다.
직설적인 "사랑한다", "보고 싶다"는 말 대신, 괜히 퉁명스럽게 던지는 그 날카로운 단어 속에 얼마나 뜨거운 체온이 담겨 있는지를 말이다.
친정에 다녀온 60대 딸은 아마 집에 돌아가는 길에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망할 년'이라는 소리를 들은 그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너 보고 싶단다"라며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 그것이 바로 우리말의 웅숭깊은 정을 아는 자의 깊이일 것이다.
표면의 거친 껍질을 깨고 들어가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우리말의 따뜻한 알맹이. 오늘도 시골집 방 아랫목에서는 딸을 향한 늙은 어미의 지독한 사랑이 ‘망할 년’이라는 투박한 이름표를 달고 소소하게 피어나고 있다. 참 고운 능소화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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