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피는 꽃도 꽃이다
작성일 : 2026.09.15 04:39 수정일 : 2026.09.15 13:49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email protected])

어제 학교에 등교하니 담임선생님께서 [2027학년도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나누어 주셨다. 내년 3월부터 시작될 고등학교 생활을 위한 첫 관문이었다.
원서를 받아든 순간, 교실 안의 공기는 묘하게 달라졌다. 평범한 종이 한 장일 뿐인데도 급우들의 손끝에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서를 내려다보는 순간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 고교 입학원서를 무려 50년 만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녔다면 이 원서는 50년 전, 혈기 왕성했던 청소년의 어느 날에 작성했을 것이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이름을 쓰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인생은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공부는 중단됐고, 세월은 야속하리만큼 빠르게 흘렀다.
어느덧 소년은 사라지고 머리 희끗한 60대 후반의 노인이 되어버렸다. 그런 내가 지금 ‘고등학교 입학원서’에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적고 있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벅찬 일이기도 했다. 올해 나는 67세다. 얼마 전 공개된 모 유명 유튜버와의 인터뷰에서도 밝혔듯 나는 현재 야간 중학교 3학년생이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늦깎이 공부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50년이라는 세월의 공백은 생각보다 컸다. 기억력은 예전 같지 않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도 젊은 시절처럼 척척 되지 않았다. 어제 외운 영어단어가 오늘 아침이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조급했다. ‘내가 이 나이에 왜 이 고생을 하지?’ 때로는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찾아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남아가 칼을 뽑았으면 끝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시 책을 폈다. 다시 연필을 들었다. 다시 학교에 갔다. 그렇게 한 걸음씩 걷다 보니 어느새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이제는 고등학교 입학원서까지 작성하게 됐다.
하지만 원서를 쓰면서 나는 자꾸만 지나간 세월을 생각했다. ‘조금만 일찍 공부했더라면….’
그러나 인생에는 지우개가 없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인생의 시계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서를 작성하던 급우들 가운데는 고령과 건강 문제 때문에 벌써부터 “나는 고등학교 안 갈래”라고 말하는 분도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렸다. 그분 역시 얼마나 오랜 세월 공부를 하고 싶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연과 굴곡을 가슴속에 묻어두었을까...
그 한마디가 내 가슴을 엄동설한의 칼바람처럼 파고들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이라는 전쟁터를 지나 여기까지 왔다.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청춘을 바쳤고,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책 대신 일터를 선택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병마와 싸웠고, 누군가는 가난과 싸웠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교실에 앉아 있는 우리(급우)에게는 저마다 말 못 할 인생의 사연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다시 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주름진 손으로 연필을 잡고, 돋보기안경 너머로 교과서를 바라본다.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시큰거려도 학교에 간다. 때로는 기억력이 따라주지 않아 속상해하면서도 다시 외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공부가 아니라 인생 그 자체를 다시 쓰는 일인지도 모른다.
입학원서 마지막 칸에 서명을 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그래,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가보자!’
남들보다 무려 50년이나 늦게 쓰는 고교 입학원서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종이 한 장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지난 50년의 눈물과 오늘의 용기,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내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담은 한 장의 이력서였다.
인생에 늦은 때란 정말 없는 것일까. 나는 이제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고 싶다. “늦었다고 포기하는 순간이 진짜 늦은 것이다.”
내년 봄, 교복을 입고(사실 우리학교엔 교복이 없지만) 다시 고등학교 교정에 서는 날을 꿈꾼다. 그날만큼은 68세의 노인이 아니라, 50년 만에 다시 꿈을 찾은 한 사람의 신입생이고 싶다.
그리고 그때 내 가슴속에서 가장 크게 울릴 말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홍경석, 참 잘 왔다. 여기까지 정말 잘 왔다.” -> 그런데 이 부분에서 벌써부터 눈물이 핑~ 도는 건 대체 어떤 연유일까?
어쨌든 늦게 피는 꽃도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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