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보다 무서운 을
작성일 : 2026.09.20 07:49 수정일 : 2026.09.20 08:07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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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보다 무서운 을 이미지를 AI로 생성 |
갑과 을이라는 말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관계의 이름이다. 직장에서는 상사와 부하 직원, 거래에서는 발주처와 협력업체, 행정에서는 기관과 민원인이 갑과 을의 자리에 선다.
어느 순간에는 갑이 되었다가 다른 자리에서는 을이 되기도 한다. 세상은 서로 다른 힘의 크기가 교차하는 구조 위에서 움직인다.
문제는 힘의 차이가 존중의 차이로 둔갑할 때 시작된다. 갑은 직책과 결정권을 앞세워 을의 사정을 가볍게 여기기 쉽다. 거절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불이익을 암시하며 침묵을 강요하는 갑질도 여기서 비롯된다.
갑질이 반복되는 까닭은 개인의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분위기와 책임보다 성과를 앞세우는 관행, 약한 사람의 목소리를 가볍게 여기는 믿음이 함께 작용한다.
그러나 을은 결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존재가 아니다. 을에게는 갑이 쉽게 빼앗을 수 없는 기록과 기억이 있다. 문자와 전자우편, 회의록과 계약서, 반복된 지시의 정황은 시간이 지나도 사실을 붙잡아 둔다.
현장에 있던 사람의 증언은 문서에 담기지 않은 맥락까지 보완한다. 흩어져 있던 자료와 기억이 결정적인 순간 하나로 이어지면, 갑이 감추고 싶었던 문제는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부 고위직 인사나 공공기관의 주요 보직을 둘러싼 검증 과정에서도 이러한 원리는 작동한다. 후보자의 경력과 해명만으로는 보이지 않던 사실이 함께 일했던 사람의 증언, 남겨진 자료, 시민사회의 문제 제기와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되기도 한다.
갑은 주변의 을이 구체적인 자료와 기억을 갖고 있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한다. 그래서 검증의 순간에 드러나는 을의 목소리는 때로 가장 강력한 질문이 된다.
물론 을의 반격은 보복이나 폭력이어서는 안 된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나 분노를 앞세우는 일은 또 다른 부당함을 낳는다. 필요한 것은 사실에 근거한 자료 제시와 일관된 증언, 공적인 절차에 따른 검증이다.
잘못이 확인된다면 지위와 무관하게 책임을 묻는 것이 정의다. 그것은 갑을 무너뜨리기 위한 복수가 아니라, 권한은 책임과 함께 행사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는 일이다.
진정한 강자는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자신의 힘이 영원하지 않고, 오늘의 을이 내일의 갑이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갑과 을의 관계를 바꾸는 길은 힘의 자리를 뒤집는 데 있지 않다. 서로의 권리와 존엄을 인정하고, 말할 통로를 열며, 기록과 절차가 공정하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갑보다 무서운 을이 필요한 세상은 결국 갑질이 사라지지 않은 세상이다. 우리가 지향할 곳은 을의 침묵이 두려움이 되는 사회가 아니라, 갑과 을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며 책임지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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