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았기에 더 멀리 본 사람
작성일 : 2026.09.30 18:45 수정일 : 2026.09.30 18:49
작성자 : 계석일 기자 ([email protected])
강영우 박사가 남긴 사랑과 감사,
보이지 않았기에 더 멀리 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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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선복 작가 칼럼니스트, 도서출판 행복에너지 대표 |
사람의 인생을 무엇으로 평가해야 할까요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가
고(故) 강영우 박사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저는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가.”
강영우 박사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보다
더 극적이었습니다.
열세 살에 아버지를 잃고 이듬해 축구공에 눈을 다쳐 시력을 잃었습니다
같은 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피츠버그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교육과 장애인 권익 분야에서 활동했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미국 국가장애위원회 위원으로 상원 인준을 받아 차관보급 공직을 수행했습니다
제가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강영우 박사는 ‘백악관에 들어간 시각장애인’만이 아닙니다
그의 곁에는 한평생 손을 잡고 함께 걸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은옥 여사입니다
1962년 숙명여대 1학년이던 석은옥 여사는 서울맹학교 봉사활동에서 당시 중학교 2학년 강영우 학생을 만났습니다
그 만남은 10년 뒤 결혼으로 이어졌고
두 사람은 1972년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삶을 생각하며 이런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사랑은 앞에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함께 걸어주는 것입니다
석은옥 여사는 남편의 ‘눈’으로만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자기 힘으로 세상에 설 수 있도록 함께 꿈꾸고
두 아들을 키우며
한 가정을 일으켜 세운 인생의 동반자였습니다
낯선 미국에서 남편의 학업과 사회활동을 함께하고, 자신도 오랫동안 시각장애인 교육과 봉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실제로 석 여사는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시각장애인 교사로 28년간 일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에서 두 아들이 자랐습니다
장남 진석, 폴 강은 안과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아들이 사람의 눈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을 울립니다
차남 진영
크리스토퍼 강은 법률과 공공정책의 길을 걸었고 아버지에 이어 백악관에서 선임법률고문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의 성공보다 제가
더 깊이 바라보는 것은 그 가정이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주었는가입니다
강영우 박사가 물려준 가장 큰 재산은 돈도, 직함도 아니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그는 두 아들에게
“해 보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뜻의 가르침을 반복해서 전했습니다
자녀교육에서도 자신감과 자존감 긍정, 소통, 끈기 등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무엇일까요
좋은 집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재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훌륭한 교육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오래가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넘어졌을 때 어떻게 일어났는지
어려운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성공했을 때 얼마나 겸손했는지
받은 사랑을 어떻게 세상에 돌려주었는지
자녀는 부모의 말보다 부모의 삶을 더 오래 기억합니다
그리고 2011년 강영우 박사에게 마지막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췌장암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원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았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시간을 얻은 것조차 감사하다는 뜻의 마지막 인사를 남겼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한참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눈을 잃었습니다
부모님을 일찍 잃었습니다
가난과 편견을 견뎠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수많은 벽을 넘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암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에 그가 선택한 단어는 ‘불행’이 아니라 감사였습니다.
더 가슴을 울리는 것은 가족에게 남긴 마음입니다
아내에게는 젊은 시절 처음 만났던 순간을 돌아보며 평생 함께해준 사랑에 감사했습니다
두 아들에게는 함께했던 추억이 있기에 행복하게 마지막을 맞을 수 있다는 뜻을 전했고, 두 아들의 아버지로 살아온 삶 자체를 축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생각해봅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무엇을 떠올리는가
백악관 집무실이 아니었습니다
박사학위가 아니었습니다
명예도 아니었습니다.
아내였습니다
두 아들이었습니다
가족이었습니다.
함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떠나는 순간까지 나누었습니다
2012년 1월에는
두 아들과 함께 국제로터리재단 평화센터 장학사업을 위해 25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또 다른 누군가의 미래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움을 받았기에 다른 사람을 돕고,
교육으로 자신의 인생이 달라졌기에 다른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를 열어주고
사랑을 받았기에 더 큰 사랑으로 돌려주는 삶입니다
강영우 박사의 인생을 단순히 ‘장애를 극복한 성공신화’로만 기록한다면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결국
한 단어로 모입니다
사랑입니다.
여대생이 서울맹학교에서 내밀었던 따뜻한 손
그 손을 잡고 평생을 걸어간 남편
그 사랑 속에서 성장한 두 아들
그리고 가족에게 받은 사랑을 다시 세상에 돌려준 한 사람
강영우 박사는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바라보며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보았습니다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가족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감사할 이유를 보았습니다
저는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오면서 늘 말합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듭니다.”
강영우 박사의 삶 또한 한 권의 살아 있는 책과 같습니다
그 책의 첫 장에는 절망이 있었습니다.
중간에는 도전이 있었습니다
그 곁에는 석은옥 여사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의 성장과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놀랍게도 감사와 나눔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강영우 박사의 삶을 담는 책의 제목으로 이런 말을 떠올려봅니다
『당신이 나의 빛이었습니다』
강영우 박사에게 석은옥 여사가 빛이었고
두 아들이 빛이었으며
강영우 박사 자신도 수많은 장애인과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쓰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남기게 될까요.
얼마를 벌었다는 기록보다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이력보다
누군가가 우리를 떠올리며
“그 사람이 있어서
내 인생이 조금 더 따뜻했습니다.”
라고 말해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요
오늘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한 번 더 잡아주십시오
부모님께 전화하십시오
배우자에게 고맙다고 말하십시오
자녀에게 믿는다고 말해주십시오
그리고 도움을 받았다면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사랑은 그렇게 이어집니다
한 사람에게서
한 사람으로,
부모에게서 자녀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앞을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이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 역시 제 자신에게 묻겠습니다
권선복
남은 인생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저의 대답도 분명합니다
사람입니다
사랑입니다
감사입니다
그리고 나눔입니다
좋은 책을 만들고,
사람에게 희망을 전하고
넘어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제가 받은 사랑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랑을 세상에 돌려주며 살아가겠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2012년 2월 2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남긴 빛은 그 사람이 떠났다고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에게 남긴
사랑 속에
두 아들에게 물려준 가치 속에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걸었던 길 속에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내놓은 나눔 속에 계속 살아 있습니다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습니다.
눈은 세상을 보지만, 마음은 사람을 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빛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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