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황후보다 평민이 낫다

권력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작성일 : 2025-06-29 16:28 수정일 : 2025-06-30 00:31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casj007@naver.com)

 

엘리자베스 폰 비텔바흐, 일명 '씨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로서 아름다움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렇지만 그 화려한 외관 뒤에는 깊은 비극이 숨겨져 있었다. 씨시의 삶은 화려한 궁정 생활과 개인적 고통이 교차하는 역설적인 이야기다.

 

씨시는 황실에 들어간 후 자유로운 영혼이 갇히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엄격한 궁정 예절과 시어머니 조피의 간섭은 그녀를 점점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특히 시어머니는 교육을 명목으로 씨시가 낳은 자녀들을 빼앗아 갔고, 남편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아내의 고통에 무관심했다. 황실 생활의 압박은 씨시에게 우울증과 거식증을 가져왔다.

 

'아름다운 황후'라는 명성에 부응하기 위해 외모에 강박적으로 집착했으며, 19~20인치의 가는 허리를 유지하기 위해 꽉 조인 코르셋을 착용하고 엄청난 양의 운동을 했다고 한다.

 

씨시는 시어머니 조피에게 대항하기 위해 헝가리 독립을 지지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더 큰 비극은 마찬가지로 헝가리 독립을 지지했던 아들 루돌프가 서른 살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이후 씨시는 아들을 애도하는 의미로 검은 옷만을 입었다. 황실에 환멸을 느낀 씨시는 말년을 여행으로 채우며 보냈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도피를 위한 방랑이었으며, 황실 공식 행사 대신 정신병원을 후원하고 자주 방문했다.

 

자신도 우울증과 신경쇠약을 앓았기에 정신질환자들에게 공감했을 것이다. 씨시가 예순 살이 되던 어느 날 씨시는 비밀리에 스위스를 여행하던 중 신원이 노출되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일정을 다니던 중 아나키스트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범인은 25살의 이탈리아인으로, 무정부주의를 믿으며 왕족이라면 누구든 살해하려 했다고 증언했다.

 

씨시의 사망 이후, 남편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깊은 후회와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비극적인 황후의 삶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오늘날 씨시는 아름다움과 비극이 공존했던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며, 그녀의 삶은 화려한 외관 뒤에 숨겨진 고통과 외로움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우리는 쉬이 황후의 화려한 삶을 동경한다. 그러나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라는 말도 있듯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은 과언이 아닌 실체를 지닌 현실이다.

 

이는 마치 빵을 달라고 국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고 말했다며 마리 앙투아네트를 무참히 습격한 당시의 정치권과 민심이 방증하는 셈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엘리자베스 폰 비텔바흐에 버금가는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였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태어나 아름다운 외모로 작은 요정이라 불렸다.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자 국고를 낭비한 죄와 반혁명을 시도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재력까지 남다른 지인의 취미는 장날 장터를 찾아 막걸리와 순대로 지난 시절과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때론 황후보다 평민(平民)이 낫다는 평범한 어떤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권력? 그거 별거 아니다. 고작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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