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갑은 이진숙의 손목만이 아니었다.
작성일 : 2025-10-03 14:32 수정일 : 2025-10-03 15:11 작성자 : 고무열 (gmy88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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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무열 교수 |
수갑은 이진숙의 손목만이 아니었다.
영등포경찰서 앞에 벌어진 장면은 한 시대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수갑에 묶여 끌려 내려오는 모습은 개인의 불운을 넘어 민주주의의 퇴행을 드러냈다. 출석요구서는 늦게 도착했고, 불출석 사유서까지 제출된 상황이지만, 이렇게 과거 깡패 조리돌리듯 보란 듯이 체포했다.
당일 그녀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무려 38시간의 필리버스터를 지키고 있었다. 정상적인 수사라면 일정을 조율해야 했다. 그러나 경찰은 서둘러 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법은 권력의 방패가 되었고, 경찰은 충직한 심부름꾼으로 전락했다.
이것은 단순한 집행 착오가 아니다. 비판적 언론인을 향한 노골적 사냥이다. “이진숙 죽이기”라는 말이 괜한 과장이 아니다. 언론 장악을 위한 정치적 의도가 엿보인다. 정권은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귀를 닫으려 한다. 수갑이 채워진 것은 한 개인의 손목이 아니라, 대한민국 언론 전체에 재갈을 물린 것이다.
민주주의의 이름을 걸고 있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파괴였다. 경찰은 권력의 집행 도구가 되었고, 법원은 그 정당성을 보증하는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무지막지한 권력이 불편한 사람은 끌고 가고, 저항하는 목소리는 꺾어버린다. 터키의 에르도안,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헝가리의 오르반이 걸었던 길이 이 나라에서도 데칼코마니처럼 재현되고 있다.
정권과 여당의 최근 행보는 권력이 식기 전을 인식했는지 더욱더 노골적이다. 민주당은 ‘배임죄 폐지’까지 추진하고 있다. 배임죄는 기업 자산과 공공 자산을 지켜온 최소한의 법적 안전망이다. 이 장치를 허무는 것은 단순한 형법 개정이 아니다. 국가 재산을 사유화해도, 권력형 비리를 저질러도 책임을 묻기 어렵게 만드는 길이다.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국민은 모를 리 없다. 특정 정치인의 사법 리스크를 덮어내려는 시도라는 의심은 피하기 어렵다.
경제 상황은 더없이 참담하다. 가계부채는 2,000조 원을 넘어섰고, 자영업자의 폐업률은 코로나 이후 최고 수준이다. 관세 협상은 낙제점을 기록하며 수출 기업을 압박하고, 농어민은 생존의 벼랑에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정권과 민주당은 이런 현실에는 눈을 감는다. 민생은 파탄 지경인데, 그들의 관심은 오직 권력 유지와 지도자 보호에만 쏠려 있다. 더 위험한 것은 팬덤(광팬) 정치다. 이른바 ‘개딸’ 세력은 합리적 비판을 배신으로 간주하고, 민주정당을 맹목적 결사체로 바꾸어 놓았다. 내부 견제는 사라지고, 토론은 실종됐다. 민주주의의 본질인 다원성과 비판 정신이 증발하는 순간, 정치는 허울뿐인 껍데기로 전락한다.
이진숙 사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국민 전체에게 던져진 경고다. “정권에 도전하면 수갑을 차게 될 것이다.” 이는 공포정치의 방식이지 자유민주주의의 방식이 아니다. 국민은 이런 메시지를 결코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역사는 언제나 권력을 남용한 자를 심판해 왔다.
오늘의 한국 정치가 던지는 교훈은 명확하다. 법과 제도를 사적 방패로 삼는 정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언론을 짓밟고, 사법을 휘두르고, 경제를 외면하며, 팬덤 정치의 광기를 방조하는 권력은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몰락의 서곡이다.
이진숙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은 곧 언론의 수갑이었고, 나아가 국민의 입과 생각에 채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은 속지 않는다. 억압의 시대는 언제나 길지 않았다. 다만 뜨겁고 붉은 피를 요구한다. 늘 진실은 무너져도 다시 일어섰다. 언젠가 국민은 분명히 말할 것이다.
“우리는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외면하지 않고 거칠게 항거했다고 기억을 넘어 가슴에 새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