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기록으로 승화시킨 인간 승리
작성일 : 2026-01-01 22:52 수정일 : 2026-01-02 10:20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casj007@naver.com)

『택리지(擇里志)』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국토를 객관적이고 실용적으로 파악하고자 만들어진 인문 지리서다. 이중환이 당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전국을 유람하며 각 지역의 지리, 기후, 풍속 등을 관찰하고 기록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영조 27년(1751)에 초고가 완성되고, 1756년 사망 직전까지 개정판을 집필했다고 추정되고 있다.『택리지』에서는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을 정하는 기준으로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바로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이다.
이중환은 이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이상적인 거주지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최근 [NEW 서울대 선정 인문 고전 60선, 이중환 택리지]를 읽었다.
그중에서도 필자가 나고 자란‘충청도(현재 거주하고 있는 대전도 예전엔 충청도였다)’에 더욱 관심이 깊었기에 과거 이중환이 거론한 충청도의 이모저모를 살펴봤다.
먼저, 『택리지』가 충청도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거론한 곳은 내포 지역이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삽교천과 예당평야 등을 꼽았다. 또한 ‘보령만큼은 산수가 뛰어나다’라고도 했는데 이곳은 대천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충남 보령시다.
아울러 ‘특히 천안은 조선 시대에 전라도와 경상도로 가는 길이 나뉘는 교통의 요지’라고 했다. 여기서 적시한 ‘천안 삼거리’는 지금도 각종 천안 축제의 본령을 이루고 있다.
이어 대전을 거론하고 있는데 과거에 대전은 ‘한밭’이라 불리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에 경부철도가 지나고 충남도청까지 이전하면서 비약적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과거에 공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 중 첫째는 ‘유성’이고, 둘째가 ‘경천’, 셋째가 ‘이인’, 넷째가 ‘유구’라는 말이 전해온다고 했다. 참고로 ‘유성’은 현재 대전광역시 유성구이며 ‘경천’은 공주시 계룡면 그리고 ‘유구읍’과 ‘이인면’으로 추측된다.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은 1690년(숙종 16)에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1682년(숙종 6)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예조참판,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이진휴(李震休)이며, 어머니는 함양 오씨 오상주(吳相冑)의 딸이다.
또한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재종손(再從孫)이다. 그는 1713년(숙종 39) 24세의 나이로 증광 병과(增廣丙科)에 합격한 후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 병조정랑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중환은 관직에 있으면서 정변에 휘말리게 되었다. 1722년(경종 2) 이중환은 김천찰방 재임 시 목호룡(睦虎龍)에게 역마(驛馬)를 빌려주었다고 지목되어 탄핵받았던 것이다.
영조가 즉위해서는 목호룡이 임인옥사 때의 수공(首功)을 이중환에게 돌려 여러 차례 국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목호룡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아 1726년(영조 2) 12월, 사형을 감등하여 절도(絶島)로 정배되었고 1727년(영조 3) 10월에 참여한 증거가 없어 풀려났다.
하지만 동년 12월에 사헌부의 논계(論啓)로 다시 먼 변방으로 정배되었다. 이처럼 이중환은 당쟁에 휘말려 유배된 이후 죽을 때까지 전국 8도를 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이중환은 전 국토의 역사와 지리, 사람들의 주거 등을 기록하였고, 이를 『택리지』라는 결과물로 내놓았다.(국립중앙박물관 자료 참고)
사견이지만『택리지』의 완성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기록으로 승화시킨 이중환의 인간 승리라고 본다.
불후의 명작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남긴 다산 정약용과 중국 상고(上古)의 황제로부터 전한(前漢) 무제까지의 역대 왕조의 사적을 엮은 역사책인 사기(史記)를 저술한 한나라의 사마천(司馬遷)과 동격의 인물이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