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도 꿰뚫어 본 공직자의 몸가짐
작성일 : 2026-01-10 08:17 수정일 : 2026-01-10 13:45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casj0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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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마천의 ‘사기’ 이미지를 AI로 표현했다 |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의 한 명으로 꼽히며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아버지인 사마담의 관직이었던 태사령(太史令) 벼슬을 물려받아 복무하였다.
그러던 중 이릉 장군이 흉노와 전투를 벌이다 중과부적으로 진 사건에서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을 받게 되었다. 이는 기원전 99년 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장군 이릉이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무제는 진노하여, 이릉의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 회의를 열었다. 신하 모두 이릉을 비난하면서 이릉의 가족 모두 능지처참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사마천은 이릉의 충절과 용맹을 찬양하고 두둔했기에 이릉을 질투한 이광리의 모함을 받아서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사마천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사형을 면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 즉,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宮刑을 받는 것 둘뿐이었다.
벌금의 액수라는 것이 당시 기준으로 50만 전이었는데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서 정병 5천 명을 1년 동안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 총합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이 때문에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직책으로 받는 녹봉으로 이 벌금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으나,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다(궁형으로 인하여 고환이 제거되어 그의 초상화에는 수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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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층 고가 아파트 이미지를 AI로 나타냈다 |
궁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부터 편찬중이었던 역사서《사기》의 편찬을 완료하였다.《사기》의 위대성은 방대한 자료와 인물 중심의 체계적 구성, 그리고 중국 역사와 문화에 미친 깊은 영향에서 비롯된다.
《사기》는 약 130권에 달하는 방대한 역사서로, 본기·세가·열전·서·표 등 다양한 형식으로 전국시대부터 춘추시대까지의 인물과 사건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각 편마다 인물 중심의 서술과 다양한 고사성어(예: 관포지교, 문경지교, 와신상담 등)가 등장해, 중국 역사와 문화의 상징적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단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 고사성어와 역사적 교훈을 전파하며, 오늘날까지도 인류 문화유산으로 존중받고 있다.
그 주인공 사마천이 이르길 “여자는 궁궐 안에 있기만 하면 질투를 받고 선비는 어질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조정에만 들어가면 의심을 받는다”라고 했다. 공직자(또는 그에 준하는 자)의 몸가짐과 중차대함을 꿰뚫어 본 촌철살인의 명언이었다.
이를 시대적 연관성의 관점에서 일갈한다. 자격 미달에 부동산 투기꾼이 무슨 장관 후보인가? 국민들의 지탄과 비웃음이 들리지 않는가!
현행 꼼수로 청약 점수를 부풀려 분양받은 ‘로또 아파트’로 순식간에 수십억 차액까지 남기며 거부로 환골탈태하는 행태 역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대한 일벌백계는 아파트 부정 청약 당첨에서 발생한 시세 차익금의 전액 환수는 물론, 법정 최고 형량 뒤 구속 따위의 강력한 법 집행으로 근절이 마땅하다. 현대판 혹리(酷吏,‘사기’에 나오는 가혹한 법 집행으로 악명높았던 정치 관리들) 제도의 도입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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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직자 몸가짐 이미지를 AI로 표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