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6-03-23 08:35 수정일 : 2026-03-23 09:04 작성자 : 김상호

논설위원 김상호
대한민국 수출의 심장, ‘자동차와 반도체’의 위기
미국 행정부가 동맹국을 가리지 않고 무역법 301조라는 매서운 칼을 빼들었다. 발단은 지난달 미 연방대법원이 기존에 부과하던 상호관세에 대해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리면서부터다.
미국 정부는 기존 관세가 무효화되자 이를 우회할 새로운 무기를 꺼냈다. 미국무역대표부(USTR)를 앞세워 한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16개국을 상대로 제조업 분야의 ‘구조적 과잉 생산’을 문제 삼으며 전면적인 조사에 돌입한 것이다.
조사 기간은 단 150일이다. 임시로 적용된 관세가 만료되기 전에 조사를 속전속결로 끝내고, 주요 교역국에 예전보다 훨씬 강력한 고율 관세를 덮어씌우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담겨 있다.
한미 정상은 지난해 3500억 달러 대미 투자와 한국에 대한 상호관세를 15%로 낮추기로 합의했다. 한국 국회는 12일 대미투자특별법까지 통과시켰다. 그런데 USTR 대표는 “무역 합의사항은 유지된다”라면서도 “301조 조사 결과에 따라 관세 또는 다른 조치가 있을 수 있다”라고 예고했다. 한국이 미국의 다른 무역합의국인 일본 대만보다 차별적 대우를 받거나 추가 관세 보복을 당한다면 합의를 이행할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대한민국 수출의 든든한 효자 노릇을 해온 자동차와 부품 산업이다. 우리 자동차 산업은 전체 수출 물량의 무려 49%를 미국 시장에 의존하고 있을 만큼 쏠림 현상이 극심하다.
여기에 인공지능(AI) 특수를 누리며 경제를 이끌고 있는 반도체까지 더하면, 대미 수출의 40% 이상이 미국의 직접적인 사정권 안에 놓이게 된다.
미국이 자국 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최악의 시나리오인 25%의 고율 관세를 무차별적으로 때린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한국의 대미 수출은 한순간에 246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32조 원이 허공으로 증발하게 된다.
이러한 거시적인 위기는 결국 밑바닥 경제로 고스란히 흘러내린다. 대기업 완성차 업체의 수출 컨테이너가 미국 관세 장벽에 가로막혀 항구에 묶이는 순간, 그 피해는 수천 개의 1차, 2차 하청업체로 향한다.
당장 다음 달 공장을 돌릴 전기세와 직원들 월급을 걱정해야 하는 중소 협력업체들은 줄도산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대기업들은 고율 관세를 피하기 위해 기업들이 어쩔 수 없이 국내 투자를 멈추고 미국 현지로 공장을 옮기게 될 것이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국내 산업 공동화 현상을 불러올 것이다.
막대한 국부가 사라지면서 국가 경제 전체의 성적표도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이 애초 예상했던 올해 경제 성장률 2.0%는 순식간에 0.8%에서 1.3% 수준으로 반토막이 난다.
경제 성장률 0%대 진입은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심각한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나 겪어보던 끔찍한 수치다. 파이가 커지지 않고 축소되는 경제 상황에서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결국 미국발 무역법 301조 조사는 바다 건너의 복잡한 외교 문제가 아니다. 튼튼했던 내 직장이 위태로워지고 얇아진 지갑 탓에 동네 상권의 불이 꺼지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뼈아픈 대한민국의 위기다.
한국이 고정밀 지도 데이터 반출을 허용하는 등 미 산업계의 비관세 장벽 요구를 수용하려고 노력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추가 조사 대상이 되거나 관세 폭탄을 맞는 일은 막아야 한다.
중국발 공급 폭탄, 사이클 아닌 구조적 위기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운 중국이 기초 석유화학 제품의 자급률을 100% 가까이 끌어올리면서 발생한 거대한 구조적인 위기다. 중국발 저가 물량 공세가 전 세계 시장을 덮치면서 국내 기업들의 제품은 가격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와함께 벌써부터 석유화락제품 선두 기업인 LG그룹의사업 재편은 자연스럽게 뼈를 깎는 인력 구조조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LG화학은 현재 2006년 이전 입사자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LG화학은 지난해 4분기에만 무려 4곳의 자회사 및 합작법인을 매각하거나 청산하는 결단을 내렸다. 중국 에스테틱 사업을 영위하던 합작법인 LG건생과기를 비롯해 아시아 종자 시장 공략을 위해 세웠던 팜한농 태국법인이 명단에 올랐다.
또한 수처리 사업 관련 법인을 매각하고, 태광산업과 합작해 세웠던 티엘케미칼 지분까지 전량 넘기며 한계 사업 정리에 속도를 냈다. 투자 대비 성과가 부진하거나 업황 회복이 불투명한 곳은 과감하게 잘라낸 것이다.
청춘을 바쳐 일해온 20년 차 이상의 숙련된 베테랑들마저 회사를 떠나야 하는 잔혹한 현실이다. 지난해 석유화학 공장 임금피크제 대상자에 이어 구조조정 칼바람의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과거처럼 불황을 무조건 버티면 다시 호황이 찾아올 것이라는 낡은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정부는 미국과 협의를 통해 에너지 협력과 원전, 조선업 등 양국에 도움이 되는 1호 투자 프로젝트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한미 관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우리 국익의 마지노선을 지킬 안보·경제 종합대책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