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열 박사의 선구안]
작성일 : 2026-05-14 10:20 수정일 : 2026-05-14 11:33 작성자 : 고무열 논설위원 (gmy88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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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열 박사(안전교육원 원장) |
AI 시대에 걸맞은 선거제도 개선이 필요, 이제는 ‘금지의 선거’와 결별할 때
■ 선거는 허용이 아니라 자유다.
대한민국의 선거제도는 오랫동안 “관리 중심”으로 시행되었다. 선거의 공정성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국민과 정치인의 표현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구조가 굳어졌다. 선거철이 되면 현수막 하나, 문자 하나, 명함 한 장까지 법률 해석을 따져야 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생활 정치는 원래 국민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공식 선거기간이 아니면 후보자는 입을 조심해야 하고, 유권자조차 특정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다 선거법 위반 논란에 휘말릴 수 있다. 민주주의가 살아 움직이기보다, 법 조항 사이를 요리조리 눈치 보는 구조가 된 것이다.
■ 선진국은 왜 상시 정치활동이 가능한가?
유럽의 다수 국가는 정치활동 자체를 기본권으로 본다. 영국에서는 정당과 정치인이 연중 정책 홍보와 정치 캠페인을 벌인다. 거리 유세도 하고, SNS 활동도 하고, 토론회도 연다. 다만 선거가 시작되면 자금 지출과 방송 광고를 엄격히 관리한다. “정치 표현”은 자유롭게 두고, “불공정 경쟁”만 규제하는 방식이다.
독일 역시 정치활동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한다. 평상시 정당 활동은 당연한 민주주의 행위로 간주한다. 특정 시기에만 정치 발언을 허용하는 개념 자체가 약하다. 프랑스도 기본 구조는 비슷하다. 정치활동은 상시 가능하지만, 투표 직전 여론조사 공표 제한이나 ‘침묵기간’을 둬 유권자의 마지막 판단을 보호한다. 즉 유럽은 대체로 “정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하고, 돈과 미디어의 과열만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 거리마다 걸린 현수막 정치, 이제는 바꿔야 한다.
대한민국 선거철 풍경을 보면 도시 전체가 거대한 광고판처럼 변한다. 전봇대와 사거리마다 걸린 현수막, 상대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자극적 문구, 며칠 지나 비바람에 찢어진 플래카드는 도시 미관까지 해친다.
정책은 보이지 않고 감정적 구호만 남는다. 국민 삶을 바꾸겠다는 경쟁보다 상대를 악마화하는 경쟁이 되는 것이다. 유럽 여러 나라처럼 거리 현수막과 대형 플래카드 중심의 선거문화를 과감히 축소할 필요가 있다.
특히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종이 공보물도 시대 변화에 맞게 개선해야 한다. 선거 때마다 전국 가정에 대량으로 배달되는 공보물은 상당수가 제대로 읽히지도 않은 채 버려진다. 종이 낭비와 환경 부담도 크다.
이제는 SNS·모바일 플랫폼·전자 공보 시스템 중심으로 전환할 시점이다. 후보자의 정책 비교, 영상 토론, 공약 검증 자료를 국민이 휴대전화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젊은 세대는 물론 고령층도 스마트폰 활용이 많이 늘어난 현실을 제도가 따라가야 한다.
■ 한국식 선거법의 가장 큰 문제
대한민국 선거법은 세계적으로도 규제가 강한 편에 속한다. 문제는 이 구조가 기성 정치권에는 유리하고, 신인 정치인과 일반 국민에게는 불리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기득권 구태다. 현직 의원은 의정보고서·보도자료·행사 참석으로 사실상 상시 홍보가 가능하다. 그러나 정치 신인은 명함 한 장 돌리는 것조차 조심해야 한다. 결국 “인지도 있는 사람만 유리한 선거”가 된다.
또한 지나친 규제는 국민의 정치 참여 자체를 위축시킨다. 시민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하고 토론해야 민주주의가 성장하는데, 한국에서는 선거철만 되면 이거 불법 아니냐는 말부터 나온다. 민주주의가 축제가 아니라 법률 시험처럼 되어버린 셈이다. 얼마나 까다로우면 거의 매일 선관위 직원이 선거사무소를 순회한다.
■ 이제는 ‘금지 중심’에서 ‘자유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대한민국도 선거제도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핵심은 단순하다. 첫째, 정치활동과 정책 홍보는 상시 허용해야 한다. 정당과 정치인은 평소에도 자유롭게 정책을 설명하고 국민과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규제는 표현이 아니라 자금과 허위 정보에 집중해야 한다. 검은 돈, 조직 동원, 가짜뉴스, 여론조작 같은 행위를 강하게 처벌하면 된다.
셋째, 종이 공보물과 거리 현수막 중심의 낡은 선거문화를 디지털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정책 비교 플랫폼, 모바일 공보물, 온라인 공개토론을 활성화하면 비용도 줄고 정보 접근성도 높아진다. 넷째, 방송과 플랫폼의 공정성을 강화해야 한다. 특정 세력이 과도한 자본력으로 여론을 독점하지 못하게 관리하면 된다. 다섯째, 일반 국민의 정치 표현 자유를 폭넓게 보장해야 한다. SNS 글 하나 올렸다고 선거법 위반을 걱정하는 사회는 건강한 민주주의라 보기 어렵다.
■ 민주주의는 통제보다 참여에서 강해진다.
선거는 국가가 허락한 기간에만 정치 이야기를 하는 행사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매일 정치에 참여하고 토론하며 감시할 때 건강해진다. 유럽 여러 나라가 보여주듯, 선진 민주주의는 정치활동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신 돈과 권력의 불공정을 통제한다.
대한민국도 이제는 선거운동을 얼마나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국민의 정치 참여를 어떻게 더 자유롭고 공정하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거리마다 난립한 현수막과 종이 홍보물이 아니라, 정책과 토론이 중심이 되는 선거문화로 나아갈 때 민주주의의 수준도 함께 높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