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는 망사’로 가는 장관급 인사의 불협화음
작성일 : 2026.09.05 07:16 수정일 : 2026.09.05 17:19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email protected])

백제 멸망의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신라와 당의 연합에 대비하지 못한데다 지배층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백제 멸망 당시의 왕이 의자왕(義慈王, ?~660)이라는 사실은 한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의자왕 하면 삼천궁녀가 떠오를 정도로, 백제 멸망이 의자왕의 사치와 향락 때문이었다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천궁녀는 야사에 떠도는 말일 뿐 실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3,000’이라는 숫자는 실제 3,000명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많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인 숫자’이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어떤 인물이고, 백제 멸망의 진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자왕은 용감하고 결단성 있는 인물이었다.
백제 무왕의 맏아들인 그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라고 일컬었다 한다. 즉위한 이듬해인 641년에 고구려와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기도 했고, 신라의 주요 거점인 대야성을 점령하고 신라의 30여 개 성을 빼앗기도 했다.
그 뒤에도 10여 년간 거의 매년 신라와 공방을 벌였고, 멸망하기 5년 전인 655년에는 고구려, 말갈과 동맹을 맺어 신라의 30여 개 성을 쳐부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싸움 바로 뒤 김춘추는 당을 부추겨 백제와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는 외교에 성공한다.
그것이 백제 멸망의 시작이었다. 거듭된 전쟁과 당의 위협 때문이었을까? 의자왕은 즉위 16년째 되는 656년부터 주색에 빠지기 시작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는 총신인 성충의 간언을 듣기는커녕 감옥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다.

이듬해인 657년에는 큰 가뭄이 들어 한해에도 논밭에 아무것도 없는 지경인데도 41명의 아들들에게 전원 좌평 벼슬을 주고 시름을 내릴 정도로 실정을 저질렀다. 그 뒤 660년 나당연합군이 처음 들어오자 백제는 계백의 황산벌 전투 외에는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 무너져버렸고, 의자왕은 포로로 신세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다.
의자왕의 실정이 백제 멸망의 한 원인이기는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새롭게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당의 의도와 힘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주요한 원인은 백제 지배층 내부의 분열이었다. 나당연합군이 침략해오는 긴급한 상황에서도 백제는 기민한 수비 전략을 갖추지 못했다. 또한 사비성에서 의자왕 대신 수비를 끈질기게 하던 의자왕의 둘째 왕자 태를 의심해 성문을 열고 도망치는 태자 부여융과 그의 아들 부여문사 때문에 사비성이 쉽게 함락될 정도로 왕실 내부에서도 분란이 있었다. -
이상은 최용범 저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의 <의자왕의 항복 때문에 백제가 망했다?> 편에 나오는 대목이다. 현 정부가 부적격자의 장관급 인사로 인해 국민 지지까지 떨어지는 악재에 시달리는 모양새다.
인사는 만사라 했거늘 되레 ‘인사는 망사’로 가는 바람에 빚어진 당연한 후과라고 보여진다. 세간에서는 심지어 “사람이 그리도 없나?”라는 한탄까지 속출하고 있다.
위에서 ‘의자왕의 몰락’을 살펴봤듯 실정과 실패의 주인(主因)은 앞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선각(先覺)의 무지 때문이다. 임명하면 반드시 사달이 날 것을 알면서도 밀어붙였다면 이는 국민을 모독한 행위와 다름없다.
그 부적격 대상의 장관 후보자는 누구인지 국민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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