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치고 돌아온 자녀 대신 그 부모가 머리 숙인 셈
작성일 : 2026.10.17 07:04 수정일 : 2026.10.19 01:56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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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길이 거센 현장에서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들 모습을 AI 이미지로 생성(챗 GPT) |
조선시대 폭군 연산군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발언인지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면 묘한 역설이 생긴다.
역사를 두려워했다는 사람이 왜 훗날 역사에 길이 남을 폭정을 저질렀을까. 결국 권력은 그 순간의 말보다 훗날 남겨질 기록과 평가를 더 무겁게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이 아닐까.
최근 벌어진 일도 그래서 씁쓸하다. 추미애 경기도지사는 지난 10월 1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경기도 국정감사에서 소방 관련 재정 부담을 설명하면서 “소방이 가장 큰 골치 아픈 재정 빨대 같다”라고 말했다.
경기도 측은 소방공무원이 국가직으로 전환됐음에도 관련 재정을 지방자치단체가 대부분 부담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취지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표현은 상당한 논란을 불렀고, 소방공무원 노조 등이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더구나 사흘 뒤인 10월 16일 부천의 한 금속 도장공장에서 큰불이 났다. 소방관과 공장 관계자 등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소방관 중에는 중상자와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된 대원도 있었다.
추 지사는 예정된 일정을 취소하고 현장을 찾아 부상 소방관들의 치료와 회복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바로 그 장면에서 나는 ‘빨대와 드럼통’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빨대는 무엇인가. 무언가를 거침없이 빨아들이는 도구다. 그렇다면 소방을 ‘재정 빨대’라고 표현했을 때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화마와 싸우는 소방관들은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을 단순히 돈을 소모하는 대상으로 표현한다면, 그 말을 듣는 당사자들의 자긍심은 과연 온전할까.
반대로 드럼통은 무엇인가. 이는 또한 거대한 양을 담아내는 용기다. 나는 정치권이 국민 세금과 예산을 바라볼 때 오히려 이 ‘드럼통’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 조직의 예산을 단순히 ‘얼마나 많이 먹느냐’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돈이 국민에게 어떤 안전과 서비스를 돌려주는지를 따져야 한다.
소방 예산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소방을 재정 부담의 상징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위험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며, 사고 현장에서 부상자를 구조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소방 예산의 가치가 재난의 순간에는 생명보험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정치권의 씀씀이는 어떠한가.
2026년 국회의원 1인에게 지급되는 수당과 경비는 연간 약 1억6,100만 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의원실 운영과 보좌진 인건비 등 의정활동 지원 비용까지 더하면 의원 한 명을 위해 투입되는 국가 예산은 훨씬 커진다.
물론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에도 비용은 필요하다. 국민을 대신해 법률을 만들고 정부를 감시하며 정책을 연구하는 데 돈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는 모든 기관과 직역에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방관의 인건비는 ‘재정 빨대’라고 부르면서 정치인의 의정활동 비용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소방관에게는 생명을 걸고 일하는 대가를 아까워하면서 정치인에게 들어가는 각종 비용에는 왜 그렇게 관대한가.
특히 정치인은 국민에게 예산 절감을 요구하기 전에 자신들의 예산부터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남의 빨대를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드럼통부터 들여다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번 논란에서 더욱 아쉬운 것은 말의 타이밍이다. 소방관들의 헌신을 폄훼할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표현이었다면 정치 지도자는 신속하고 진솔하게 사과하는 것이 옳(았)다.
실제로 더불어민주당도 16일 추 지사의 표현으로 상처받은 소방공무원과 가족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이는 밖에서 사고치고 돌아온 자녀 대신 그 부모가 머리를 숙인 셈이었다.
정치는 결국 말로 시작하지만 책임은 행동으로 완성된다. 연산군이 두려워했다는 ‘역사’는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오늘의 권력자가 어떤 말을 했으며, 그 말에 어떤 책임을 졌는지를 기록한다.
소방관은 국민의 생명을 빨아먹는 ‘재정 빨대’가 아니다. 그들은 불길 속으로 들어가 국민의 생명을 건져 올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정치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예산의 크기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한 역사적 평가인 것이다.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찬가지다. 소방에는 말도 안 되는 ‘빨대’를 들이대면서 정치에는 ‘드럼통’을 내미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바로 국민이 바라는 최소한의 공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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