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 선관위로 말미암은 민주주의의 퇴행 일갈(一喝)
작성일 : 2026.06.08 05:16 수정일 : 2026.06.08 15:14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email protected])

삼한 시대(三韓時代)의 신성 구역이었던 '소도(蘇塗)'는 독특한 공간이었다. 그곳은 제사장인 천군이 지배하는 신성한 성역이었기에, 세속의 권력과 법조차 침범할 수 없었다.
심지어 대역죄를 지은 죄인이 소도로 도망쳐 숨더라도 국법으로 그를 잡아가지 못했다.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 법 위의 치외법권 지대였던 셈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 고대의 유물을 다시 호출하게 된 현실은 참담하다.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참정권을 관리하고 공정한 선거의 판을 짜야 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가 오늘날 스스로를 법 위의 존재, 즉 현대판 '소도'로 규정하며 민주주의의 퇴행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선관위의 오늘날은 안하무인과 주먹구구, 그리고 오만으로 점철되어 있다.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성스러운 축제를 관리하는 기관이 도리어 국민의 신뢰를 가장 먼저 잃어버린 장본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그간 선관위가 보여준 행태는 독립성이라는 방패 뒤에 숨은 권위주의의 부활이었다. 자녀 특혜 채용 의혹, 방만하고 투명하지 못한 조직 운영, 그리고 선거 관리 과정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부실과 주먹구구식 대처들은 선관위가 얼마나 고여 있고 썩어 들어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외부의 정당한 감사나 감시의 눈길조차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거부하는 모습은, 죄인을 품고 공권력의 진입을 막아서던 고대의 소도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헌법이 선관위에 독립성을 부여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권력의 외압에 흔들리지 말고, 주권자인 국민의 소중한 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정하게 지켜내라는 준엄한 명령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특혜의 독립성은 국민의 참정권을 수호하기 위한 '수단'이지, 조직의 비리와 무능을 은폐하기 위한 '특권'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관위는 이 독립성을 자신들만의 성벽으로 오용했다.
외부의 비판을 철저히 차단한 채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했고, 그 결과 조직은 비대해졌으나 기능은 퇴화했다. 국민의 참정권을 우습게 치부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선거를 관리하는 태도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뿌리째 흔드는 행위였다.

투표용지를 소쿠리에 담아 나르던 해프닝은 단순한 행정 실수가 아니라, 국민을 대하는 그들의 오만한 인식이 수면 위로 드러난 상징적 사건이었다.
민주주의는 제도의 완벽함이 아니라, 그 제도를 운용하는 기관의 투명성과 국민의 신뢰로 유지된다.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과 정당성은 선관위의 공정함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선관위가 스스로를 치외법권적 존재로 여기며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할 때, 선거의 공정성은 의심받고 민주주의는 퇴행할 수밖에 없다.
불신이 가득 찬 선거판에서 태어난 권력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이는 곧 사회적 갈등과 비용으로 직결된다. 선관위의 소도화(蘇塗化)가 가져온 가장 치명적인 해악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 현대판 소도의 성벽을 허물어야 한다. 선관위는 더 이상 성역이 아니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독립은 고립일 뿐이며, 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선관위는 기억해야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천군의 시대는 진작에 끝났다. 선관위가 진정으로 민주주의의 퇴행을 막고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소도'의 장대를 스스로 꺾고 나와 국민의 엄중한 감시와 법의 테두리 안으로 걸어 들어와야 한다.
뼈를 깎는 인적 쇄신과 투명한 공적 감시를 수용할 때만이, 선관위는 비로소 치외법권의 오명을 벗고 국민의 참정권을 지키는 민주주의의 파수꾼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 삼한 시대(三韓時代) : 우리나라의 남쪽에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는 부족 국가가 존재했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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