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는 바다 밑에서도 황제다
작성일 : 2026.07.25 05:56 수정일 : 2026.07.26 07:49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email protected])

작년부터 시작한 야학(夜學)은 내 삶의 지도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예전 같았으면 해가 질 무렵부터 허룽허룽 술에 취해, 돌아오지 않을 천금 같은 시간들을 허투루 흘려보냈을 터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시간이 되면 깨끗이 목욕재계하고 배움의 터전으로 향한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면 밤 열 시. 책상에 앉아 숙제와 예습을 하고,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다 잠자리에 든다. 그러고도 이튿날 새벽 서너 시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영락없는 새벽형 인간이다. 하긴 뭐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벌써 20년 이상 몸에 밴 습관화된 일상이니까. 아침 일곱 시가 되면 집을 나서 노인 일자리에 참여하고자 ‘출근’을 한다.
나와 같은 6070 세대가 주를 이루는 그 ‘임시 직장’은 내게 야학 학교와 별반 다름없는 배움터다. 아니, 그곳에서 얻는 지식과 상식의 보고(寶庫)는 얼추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는 화수분 급이다.
삶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생 선배이자 동료들로부터 주워듣는 1등급 정보는 나에게 새로운 세상의 창을 열어준다. 오늘의 이야기도 그렇게 일을 함께하는 절친한 분들의 귀동냥에서 시작되었다.
주인공은 우리 동네서 가까운 꼼지락 시장 안의 자타공인 수선(修繕) 달인(達人) 할머니다.
평소 나는 아내가 사다 주는 옷을 입는다. 40년 이상을 한 지붕 아래 살다 보니 아내는 귀신처럼 내 체형과 맞는 사이즈의 옷을 척척 골라낸다.
그것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센스 있는 옷들로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마음에 드는 옷이라도 간혹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생기곤 했다.
바로 바짓단(바지의 아래 끝을 접어서 감친 부분)의 길이 엇박자나 허리 벨트가 통과하는 고리 부근의 어설픈 바느질과 균형의 부조화였다. 그래서 옷을 사면 늘 몇천 원의 추가 수선비를 들여 수선집에 맡겨야 하는, 작지만 감질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노인 일자리 정보통 고수님들이 건넨 한 마디 덕분이다.
“꼼지락 시장 안에 있는 [00 이불집]에 한번 가봐요! 수선의 고수인 할머니가 계시는데, 고작 1천 원이면 마음에 안 드는 바짓단부터 구석구석을 기가 막히게 다 고쳐줘요!”
무릇 유익한 정보를 알게 되었을 때 혼자만 향유(享有)하는 것은 인생의 실정법 위반 아니겠는가. 나는 즉시 아내에게 그 고급 정보를 ‘발설’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내는 그날로 그 이불집의 열혈 단골이 되었고, 다녀올 때마다 수선 달인 할머니를 어찌나 칭찬하는지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세상에~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달랑 1천 원만 받고 손님이 원하는 대로 싹 다 고쳐주는 집이 어디 있겠어? 어찌나 소문이 났던지 수선할 옷들을 아예 차로 가득 싣고 오는 사람도 부지기수라니까!”
세상에 이런 착한 가게가 또 있을까. 대저 ‘좋은 집’과 ‘착한 집’은 널리 알려 세상 사람들을 이롭게 해야 하는 법이다. 글 쓰는 기자로서의 피가 끓어올랐다.
“내가 한번 찾아가서 ‘미담 인터뷰’를 따내고 뉴스 기사로 보도해 볼까?”
호기롭게 아내 편에 취재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돌아온 아내의 말은 의외의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얼마 전에 뭘 모르고 덜컥 인터뷰를 한번 했는데, 기자에 카메라 감독까지 출동해서 그야말로 온 동네가 난리 부르스였대. 주인 할머니가 그날 너무 질려버려서, 이제 죽어도 인터뷰는 안 하겠다고 손사래를 치시더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지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 진짜 고수는 해저(海底)에 숨어 있구나.’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거나 화려한 조명을 받지 않아도, 세상의 깊은 바닥에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바느질 한 땀에 장인의 혼을 담아내는 사람. 그는 분명 요란한 소리를 내며 표면을 맴도는 그 어떤 잡어들보다, 물밑 깊은 곳에서 조용히 헤엄치는 거대한 고래였으리라.
세간의 주목과 화려한 소문이 달인에게 때로는 소란스러운 소음이자 일상의 평화를 깨뜨리는 파도일 뿐이었으리라. 할머니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방송에 나오는 유명세가 아니라, 매일 찾아오는 이웃들의 옷가지를 정성껏 만져주고 1천 원의 소박한 가치를 나누는 소소한 평화였던 것이다.
비록 미담 인터뷰 섭외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뿌듯하고 흐뭇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지고 자기 PR과 과장의 시대라 할지라도, 깊은 해저에는 여전히 중심을 잡고 바다를 지탱하는 고래가 존재한다.
그 어떤 수식어 없이도, 골목길 작은 이불집에서 홀로 바늘을 쥐고 있는 할머니는 이미 바다 밑 가장 깊은 곳을 지배하는 황제였다.
화려한 수면 위를 쫓아 허우적거리기보다, 나 역시 내 삶의 영역에서 묵묵히 깊이를 더해가는 ‘해저의 고수’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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