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의 '진짜 기백'을 보여달라

[칼럼] 축구와 정치는 다르다: 배신당한 희망, 그리고 ‘레버넌트’를 기다리며

작성일 : 2026.06.29 06:30 수정일 : 2026.06.29 12:15

작성자 : 홍경석 보도국장 ([email protected])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6)에서 전설적인 모피 사냥꾼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회색곰의 습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동료들에게 버려진다. 눈앞에서 아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차가운 땅에 산채로 파묻혔던 그는 오직 복수와 생존이라는 일념 하나로 죽음의 문턱을 넘어 돌아온다.

 

처절한 동토를 기어 다니며 기어코 살아남은 그의 인간 승리는 관객들에게 강렬한 전율을 선사했고, 주연을 맡은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는 골든글러브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처절한 생존극에 열광했을까. 그것은 절망의 끝에서 다시 일어서는 인간의 의지가 우리에게 거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기 때문이다.

 

이의 연장 선상에서 오랫동안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이 영화 속 휴 글래스처럼, 아무리 짓밟혀도 끝내 숨을 쉬며 돌아오는 희망의 상징이었던 존재가 있다. 바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다.

 

▶ 무너진 믿음, 임계점을 넘은 분노

 

하지만 지금, 국민들의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32강 진출조차 하지 못하고 조기 탈락했다는 소식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에서의 패배 그 이상이었다.

 

도저히 있어선 안 될 일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국민들이 느낀 감정은 실망을 넘어선 '분노'였고, 그 분노는 이미 임계점을 넘었다. 이 융기된 반감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축구팬들과 국민들이 그동안 아낌없이 '투자했던' 믿음에 대한 철저한 배신감이다. 밤잠을 설쳐가며 목이 터지라 외쳤던 응원, 한국 축구가 보여준 과거의 영광에 대한 신뢰, 그리고 시련을 겪더라도 결국에는 이겨낼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결과다.

 

 

▶ 축구와 정치가 다른 이유

 

누군가는 말한다. 정치도 매번 국민에게 실망을 주고 배신을 하는데, 왜 유독 축구의 실패에 이토록 격렬하게 분노하느냐고. 하지만 축구는 정치와 엄연히 다르다.

 

- 정치의 속성: 본디 한국 정치는 국민들에게 별로 신임을 받지 못해 왔다. 갈등과 분열, 약속 이행의 실패는 정치권의 고질적인 풍경이었기에, 국민들은 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 '기대치'를 낮추는 법을 진작 체득했다.

 

- 축구의 속성: 반면 축구는 달랐다. 축구는 이념도, 세대도, 계층도 초월하여 온 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무이한 매개체였다. IMF 외환위기 시절의 고통을 잊게 해준 것도, 사회적 갈등으로 지친 일상에 다시 뛸 수 있는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도 축구였다.

 

즉, 우리에게 축구는 단순한 공놀이가 아니라, 힘겨운 세월을 견디게 해준 제2의 <레버넌트>이자 삶의 위안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가장 순수하게 믿었던 대상이 보여준 무기력함과 방만함이기에, 국민들이 느끼는 한국 축구에 대한 배신감은 정치의 그것과는 궤를 크게 달리하는 것이다.

 

▶ 다시 '죽음에서 살아 돌아올 자'를 기다리며

 

정치에서의 배신은 냉소와 포기를 낳지만, 축구에서의 배신은 뼈아픈 개혁의 목소리를 낳는다. 국민들이 이토록 분노하는 이유는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한국 축구를 향한 뜨거운 애정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한국 축구는 정말이지 뼈를 깎는 성찰과 인적와 구조적 쇄신을 감행해야 한다. 시스템의 부실을 감추고 임기응변으로 버텨온 시간의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이번 월드컵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다.

 

영화 속 휴 글래스는 얼어붙은 강물에 몸을 던지고 생고기를 씹어가며 마침내 살아 돌아왔다. 지금 탈락의 아픔을 겪은 한국 축구 역시 그 처절한 야생의 땅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국민들이 던지는 분노의 채찍질을 달게 받되, 절망의 구덩이에서 다시 숨을 고르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완벽한 승리가 아니다. 짓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레버넌트>처럼, 끝내 죽음에서 돌아와 다시금 우리에게 희망을 속삭여줄 대한민국 축구의 '진짜 기백'이다.